- 예술은 저 멀리 높은 곳에 떠 있는 별과 같은 것일까? 섬처럼 동떨어진 채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고 고귀하고 도도한 체 하는 것이 예술일까? 불편한 교통과 납득하기 어려운 디자인으로 ‘예술의전당’은 말 그대로 ‘ 전당’이 우면산 자락에서 홀로 ‘예술’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건축에, 예술에, 문화에 무지한 이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예술의전당은 결국 1980년대 대한민국의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정권이기도 했다. 대중문화에선 ‘3S 정책’, 곧 스포츠(Sports)와 영화(Screen) 그리고 성(Sex)으로 대중들의 관심사를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는데 치중했다. 그래서 여러 프로 스포츠가 시작됐고, <애마부인> 등의 에로 영화가 전성기를 맞았다. 흔히 말하는 ‘고급문화’에서도 이미지를 포장하기 위한 정권 차원의 프로젝트를 벌였다. 그래서 탄생한 거대 건축물이 바로 서울 ‘예술의전당’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다.

또한 당시는 문화 공간 개념에서도 각 문화 장르별로 따로 있던 공연장이나 전시장, 오페라극장 등을 하나로 묶은 미국의 링컨 센터와 영국의 바비칸 센터 같은 복합문화시설, 즉 ‘아트센터’가 전성기를 맞았던 시기였다. 당시 이진희 문화부 장관은 이런 흐름을 참고해 그동안 국내에 없었던 대형 문화공간 건설을 주도했고, 한국 최초의 복합문화공간인 예술의전당이 서초동 우면산 자락에 들어서게 됐다. 예술의전당이 ‘뮤지엄’이 아닌 ‘아트센터’라는 영문 이름을 달게 된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여기에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국제적으로 뭔가 보여줄 만한 문화시설이 필요하다는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예술의전당은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 내에 완공하기 위해 급박하게 추진됐다. 그러나 예상 못 한 여러 이유로 완공은 계속 늦어졌다. 도로 계획상 미리 뚫어야 하는 터널 공사 등을 하느라 처음 목표였던 1986년 아시안게임 이전 완공에 실패했고, 전두환 대통령 임기 내 완공도 이뤄지지 못했다. 대통령이 노태우로 바뀐 1988년 음악당과 서예박물관이 먼저 문을 열었다. 이후 1993년 가장 두드러지는 건물인 오페라하우스가 완성되면서 비로소 예술의전당은 최종 완공됐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그래서 예술의전당은 건축계에서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되었고, 고위층이 멋대로 갓과 부채 모양을 집어넣어 디자인을 망친 건물이란 이야기는 정설처럼 굳어졌다. 잔인했고 부패했던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반감까지 더해져 예술의전당에 대한 건축계의 평가는 실로 싸늘했다.

예술의전당 음악당
예술의전당 건물 중에서 또 하나 오해가 퍼져있는 건물이 서예박물관이다. 서예박물관은 건물 전면 모양이 ‘사람 얼굴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이 이야기를 듣고 건물을 보면 정말 사람 얼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건축가는 사실무근이라고 말한다. 서예박물관은 처음 예술의전당 건립 계획에는 없었던 건물이었다. 그런데 정부 차원에서 서예 전용 공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불쑥 추가하기로 결정해 부랴부랴 1달여 만에 설계를 마치고 불과 4개월여 만에 완공되어 오히려 다른 건물보다 먼저 예술의전당 단지 안에 들어섰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건물이 이처럼 길가에 우뚝 솟은 모양이 된 것은 건축 부지에 암반이 많아 애초 계획과 달리 앞으로 전진 배치한 탓이다. 암반을 깨려면 비용도 많이 들뿐 아니라 공사 기간이 길어져 대통령 임기 내에 완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길 쪽에 가깝게 붙여 지은 것이다. 한번 지으면 수백 년을 이어질 국내 최대의 문화공간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완벽하게 짓기는커녕 대통령 관심사란 이유로 빨리 짓는 데 급급했던 당시 한국 사회의 수준이 낳은 결과였다. 이처럼 건축을 문화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정권 홍보용 이벤트로 여기는 공공기관과 정치인의 저열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앞쪽이 축대처럼 부담스럽게 길을 따라 높게 솟은 대신 그 뒤로 펼쳐지는 진입부는 땅의 높낮이 차이를 넓은 계단으로 연결하며 펼쳐지게 됐다. 일반인들이 예술의전당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바로 이 진입부 계단이다. 바닥과 건물이 모두 같은 돌 소재로 만들어져 건물과 계단이 통일감을 가지면서도 보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장면들이 만들어진다. 김석철 건축가는 이 계단 공간을 구상할 때 떠올린 것이 땅의 높낮이 차이가 큰 경주 불국사의 공간 연결 동선이었다고 말한다.

일반 대중들은 어떨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 친숙해진 만큼 좋다는 평과 나쁘다는 평이 나뉜다. 찾아가기 불편하고 거대해서 정이 가지 않는다는 반응과 건물 사이에 시원시원하게 개방 공간이 배치되고 뒤편 산과 이어지는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반응이 공존한다.
사람마다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지만 어찌 됐든 예술의전당은 1980년대란 시기의 상징이 되었다. 이 건물에는 공공건축물에 대한 80년대 한국 사회의 욕망과 취향, 인식과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건물을 짓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가 독재자 대통령을 ‘문화대통령’ 이미지로 포장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국에도 복합문화공간이 필요했고 예술의전당은 그 효시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문화 불모지였던 서울 강남지역에 들어선 최초의 대형 문화공간이란 의미도 컸다. 예술의전당은 어찌 됐든 우리 문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태어나 그 역할을 해나가고 있고, 전국 곳곳에 ‘예술의전당’이란 이름을 똑같이 붙인 복합문화시설들이 들어서는 계기가 됐다. 워낙 후미진 곳에 들어서는 바람에 도시에 미친 문화적 파급효과는 크지 않았지만 이 거대하고 논쟁적인 건물이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사진 | 예술의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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