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야기/구본준의 한국의 현대건축

예술의 전당

걍~태수 2013. 10. 17. 21:00

80년대의 욕망, 그리고 갓과 부채의 진실 - 예술의전당
예술은 저 멀리 높은 곳에 떠 있는 별과 같은 것일까? 섬처럼 동떨어진 채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고 고귀하고 도도한 체 하는 것이 예술일까? 불편한 교통과 납득하기 어려운 디자인으로 ‘예술의전당’은 말 그대로 ‘ 전당’이 우면산 자락에서 홀로 ‘예술’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건축에, 예술에, 문화에 무지한 이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예술의전당은 결국 1980년대 대한민국의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건축은 태평성대 못잖게 엄혹한 독재 치하에서 번창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정치 지도자일수록 자기의 치적을 거대 건축물로 남기려 하기 때문이다. 건축물은 가장 오래 지속되고, 누구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이기에 정치인들은 건축으로 자신을 기억되게 하고 싶어 하고, 독재자들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하다.

독재 정권에 이용되어온 대중문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 대표적인 예다. 쿠데타로 집권해 정권의 정통성이 없었으므로 더욱 건축물 남기기에 집착했다. 1980년대 한국은 그래서 수많은 거대 건축물들이 새롭게 지어진 시기였다. 국민들을 학살하고 집권한 이미지를 분칠하기 위해 88 올림픽과 86 아시안게임을 유치해 수많은 스포츠 시설을 지었고,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같은 기념비도 세웠다.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정권이기도 했다. 대중문화에선 ‘3S 정책’, 곧 스포츠(Sports)와 영화(Screen) 그리고 성(Sex)으로 대중들의 관심사를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는데 치중했다. 그래서 여러 프로 스포츠가 시작됐고, <애마부인> 등의 에로 영화가 전성기를 맞았다. 흔히 말하는 ‘고급문화’에서도 이미지를 포장하기 위한 정권 차원의 프로젝트를 벌였다. 그래서 탄생한 거대 건축물이 바로 서울 ‘예술의전당’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다.



전두환 정권이 대형 문화시설 건축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시 세계적인 흐름의 영향도 있었다. 독재정권은 아니었지만 강력한 리더십을 추구했던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파리에 새로운 대형 공공건축물들을 집중적으로 짓는 ‘그랑 프로제’ 사업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면서 세계 각국이 대형 랜드 마크 건축 경쟁을 벌이던 시절이었다.
또한 당시는 문화 공간 개념에서도 각 문화 장르별로 따로 있던 공연장이나 전시장, 오페라극장 등을 하나로 묶은 미국의 링컨 센터와 영국의 바비칸 센터 같은 복합문화시설, 즉 ‘아트센터’가 전성기를 맞았던 시기였다. 당시 이진희 문화부 장관은 이런 흐름을 참고해 그동안 국내에 없었던 대형 문화공간 건설을 주도했고, 한국 최초의 복합문화공간인 예술의전당이 서초동 우면산 자락에 들어서게 됐다. 예술의전당이 ‘뮤지엄’이 아닌 ‘아트센터’라는 영문 이름을 달게 된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여기에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국제적으로 뭔가 보여줄 만한 문화시설이 필요하다는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초대형 국가적 프로젝트로 탄생한 예술의전당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인 만큼 예술의전당 설계는 국제 설계공모로 진행됐다. 60년대 이후 한국건축을 20년 넘게 대표했던 김수근(1931∼1986)과 김중업(1922∼1988) 두 거물 건축가를 비롯해 영국 바비칸 센터를 설계한 팀 등 쟁쟁한 외국 건축가들이 공모에 뛰어들었다. 당선된 이는 뜻밖에도 서른아홉 살의 젊은 건축가 김석철(1943∼, 현 아키반 대표)이었다. 김수근과 김중업 두 사람 모두에게서 건축을 배운 독특한 경력의 김석철은 두 스승과 외국 경쟁자들을 꺾고 면적이 6만 8천 평에 이르는 초대형 국가적 프로젝트 설계를 거머쥐며 단숨에 스타 건축가로 떠올랐다.



김석철 건축가의 당선 설계안은 부지 가운데 광장처럼 넓은 마당이 배치되고, 그 주변으로 음악당과 오페라극장 등이 둘러싸면서 ‘작은 문화도시’를 이루는 디자인이었다. 프랑스 파리와 짝을 이루며 연결되는 신도시 라데팡스처럼 강북의 문화 축과 연결되는 강남 문화의 핵심 개념으로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예술의전당은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 내에 완공하기 위해 급박하게 추진됐다. 그러나 예상 못 한 여러 이유로 완공은 계속 늦어졌다. 도로 계획상 미리 뚫어야 하는 터널 공사 등을 하느라 처음 목표였던 1986년 아시안게임 이전 완공에 실패했고, 전두환 대통령 임기 내 완공도 이뤄지지 못했다. 대통령이 노태우로 바뀐 1988년 음악당과 서예박물관이 먼저 문을 열었다. 이후 1993년 가장 두드러지는 건물인 오페라하우스가 완성되면서 비로소 예술의전당은 최종 완공됐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그곳
예술의전당은 김석철 건축가의 대표작이자 80년대 한국 건축의 주요작이었지만 많은 비판을 받았다. 비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시민들을 위한 문화시설임에도 ‘접근성’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는 건축가의 잘못이 아니었다. 정권 임기 내에 짓기 위해 애초 설계와 달리 많은 부분이 바뀌었는데, 그중에서도 지하철역과 예술의전당을 연결하는 부분이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넓은 땅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는 이유로 서울 가장 끝 동떨어진 땅을 부지로 정한 탓에 대중교통 연결이 더욱 중요했음에도 제대로 이를 실현하지 못했다. 물론 건축가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도 ‘섬처럼 동떨어졌다’는 비난을 듣고 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두 번째 비판은 건축계에서 집중적으로 제기된 것으로, 건물 디자인의 ‘상징성’ 문제였다. 예술의전당을 대표하는 두 건물인 오페라극장과 음악당의 지붕이 ‘한국 전통성’을 상징하기 위해 각각 갓과 부채의 모양을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표현했다는 비판이다. 전통건축물도 아니고 주로 서양 음악을 연주하는 두 공연장이 한국적인 디자인 상징물로 처리되어 부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마치 “양복 정장 차림에 갓을 쓰고 부채를 든 꼴”이란 야유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몰랐던 갓과 부채의 진실
갓과 부채 모양에 대한 비판에는 언제나 또 하나의 이야기가 따라붙는데, 당시 고위 관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건물이니까 한국적 디자인을 집어넣으라고 압박하는 바람에 디자인이 갑자기 바뀌었다는 것이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 재임한 군사독재 시기에는 주요 공공건축물을 발주하는 건축주인 관 쪽에서 건축가에게 전통 디자인을 집어넣으라는 압력을 넣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한국 건축계는 전통 디자인에 대한 강박을 극도로 혐오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예술의전당은 건축계에서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되었고, 고위층이 멋대로 갓과 부채 모양을 집어넣어 디자인을 망친 건물이란 이야기는 정설처럼 굳어졌다. 잔인했고 부패했던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반감까지 더해져 예술의전당에 대한 건축계의 평가는 실로 싸늘했다.

예술의전당 음악당
예술의전당 음악당

하지만 건축가의 이야기는 다르다. 김석철 건축가는 “와전되어 생겨난 이야기”라고 잘라 말한다. 오페라하우스의 경우 건물 모양 자체가 원통형이니 당연히 동그란 지붕이 나오게 된 것이며, 음악당 역시 시각적 집중을 위해 객석이 무대 쪽으로 좁아지는 구조로 설계해서 자연스럽게 지붕 모양이 부채처럼 바깥쪽이 넓게 펼쳐지는 모양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갓과 부채’ 이야기가 나온 것은 설계 이후 이진희 장관을 비롯한 관료들이 건물을 설명하면서 갓과 부채 모양이라고 가져다 붙인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는 것이다.
예술의전당 건물 중에서 또 하나 오해가 퍼져있는 건물이 서예박물관이다. 서예박물관은 건물 전면 모양이 ‘사람 얼굴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이 이야기를 듣고 건물을 보면 정말 사람 얼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건축가는 사실무근이라고 말한다. 서예박물관은 처음 예술의전당 건립 계획에는 없었던 건물이었다. 그런데 정부 차원에서 서예 전용 공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불쑥 추가하기로 결정해 부랴부랴 1달여 만에 설계를 마치고 불과 4개월여 만에 완공되어 오히려 다른 건물보다 먼저 예술의전당 단지 안에 들어섰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건축을 정권 홍보용으로만 바라보는 공공기관
예술의전당이 건축적으로 비판받는 또 다른 한 가지는 건물이 앞길 남부순환도로 쪽으로 거대하고 높게 튀어나와 있어 부담감을 준다는 점이다. 한국적 정서로는 앞쪽에 개방 공간을 두고 뒤쪽에 건물을 배치하는 것에 익숙한데, 예술의전당은 정반대로 앞에 건물이 있고 뒤로 개방 공간이 펼쳐진다. 그래서 길 쪽에서 보이는 예술의전당의 첫인상은 거대한 옹벽처럼 다가온다.
건물이 이처럼 길가에 우뚝 솟은 모양이 된 것은 건축 부지에 암반이 많아 애초 계획과 달리 앞으로 전진 배치한 탓이다. 암반을 깨려면 비용도 많이 들뿐 아니라 공사 기간이 길어져 대통령 임기 내에 완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길 쪽에 가깝게 붙여 지은 것이다. 한번 지으면 수백 년을 이어질 국내 최대의 문화공간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완벽하게 짓기는커녕 대통령 관심사란 이유로 빨리 짓는 데 급급했던 당시 한국 사회의 수준이 낳은 결과였다. 이처럼 건축을 문화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정권 홍보용 이벤트로 여기는 공공기관과 정치인의 저열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앞쪽이 축대처럼 부담스럽게 길을 따라 높게 솟은 대신 그 뒤로 펼쳐지는 진입부는 땅의 높낮이 차이를 넓은 계단으로 연결하며 펼쳐지게 됐다. 일반인들이 예술의전당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바로 이 진입부 계단이다. 바닥과 건물이 모두 같은 돌 소재로 만들어져 건물과 계단이 통일감을 가지면서도 보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장면들이 만들어진다. 김석철 건축가는 이 계단 공간을 구상할 때 떠올린 것이 땅의 높낮이 차이가 큰 경주 불국사의 공간 연결 동선이었다고 말한다.



예술의전당, 1980년대 대한민국의 욕망을 상징하다
예술의전당은 어느새 올해로 개관 25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건축 전문가들의 평가는 여전히 차갑다. 건축잡지 <SPACE>가 올해 초 건축전문가들을 대상으로 광복 이후 지어진 현대건축물 중 최고와 최악을 뽑는 조사에서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는 ‘최악의 건물’ 부문에서 서울시청에 이어 두 번째로 꼽혔다.
일반 대중들은 어떨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 친숙해진 만큼 좋다는 평과 나쁘다는 평이 나뉜다. 찾아가기 불편하고 거대해서 정이 가지 않는다는 반응과 건물 사이에 시원시원하게 개방 공간이 배치되고 뒤편 산과 이어지는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반응이 공존한다.
사람마다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지만 어찌 됐든 예술의전당은 1980년대란 시기의 상징이 되었다. 이 건물에는 공공건축물에 대한 80년대 한국 사회의 욕망과 취향, 인식과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건물을 짓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가 독재자 대통령을 ‘문화대통령’ 이미지로 포장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국에도 복합문화공간이 필요했고 예술의전당은 그 효시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문화 불모지였던 서울 강남지역에 들어선 최초의 대형 문화공간이란 의미도 컸다. 예술의전당은 어찌 됐든 우리 문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태어나 그 역할을 해나가고 있고, 전국 곳곳에 ‘예술의전당’이란 이름을 똑같이 붙인 복합문화시설들이 들어서는 계기가 됐다. 워낙 후미진 곳에 들어서는 바람에 도시에 미친 문화적 파급효과는 크지 않았지만 이 거대하고 논쟁적인 건물이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사진 | 예술의전당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