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학

향수

걍~태수 2008. 2. 28. 10:13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러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

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19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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