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배우기/고전에서배우기

[스크랩] 서경 - 동양 정치사상의 원류 [ 書經 ]

걍~태수 2012. 8. 20. 09:29

인문과학 > 문학 > 동양고전작품

서경 - 동양 정치사상의 원류 [ 書經 ]

 

『서경(書經)』의 「대고(大誥)」편

『서경』이란 뭐예요?

고전으로 손꼽히지만 막상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르는 책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서경(書經)』, 곧 『상서(尙書)』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사서오경(四書五經)이라 일컫는 속에 들어 있지만 그게 무언지 잘 알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서경』이 뭐예요?" 라고 묻는 학생들이 더러 있다. 글씨, 즉 서예(書藝)에 관한 고전으로 알고 있는 학생들도 있다. 그러나 『서경』은 중국 고대의 정치 문서를 편집한 것으로, 한문 문화권에서는 오랫동안 국가통치의 거울이 되어 온 중요한 서적이다.

동양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근대의 천재로서 왕국유(王國維)1)를 손꼽는다. 그런데도 그는, "『서경』을 읽어서는 열에 다섯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시경』을 읽어서는 열에 하나 나 둘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는 자기의 독서 체험을 바탕으로, 고서를 읽기 어려운 이유를 세 가지 들었다.

첫째, 글자가 잘못되고 빠져 있는 것이 많다.

둘째, 고어는 현대어와 다르다.

셋째, 고인은 성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성어의 뜻과 성어를 이루는 단어의 개별 의미가 같지 않다. 『서경』으로 말하면, 거기다가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이라는 두 층위마저 있어 그 변별이 여간 성가시지 않다.

대학의 학부 수업에서 『서경』을 강독한 일이 있다. 학생들도 무척 힘들어했지만, 나 자신도 수업 준비를 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그 뒤 우리 학과에서는 『서경』를 포함한 삼경은 학부 과목으로는 하지 않는다. 『맹자』와 『논어』를 중심으로 한다. 그래서 그때 어려운 이경전을 읽어야 했던 학생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수업을 들었던 몇몇 학생들이 동양사학이나 중국 철학을 전공하여 대륙의 유수한 대학 박사과정에 진학까지 해 있기 때문이다. 아마, 나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서 그랬나보다.

『서경』은 중국 고대 문화의 원류를 담고 있는 책으로서 본래는 '서(書)'라고 부르다가 한나라 때 들어와서 '상서(尙書)'라고 하였다.2) 순자(荀子)는 『상서』를 '정치의 기(紀)'라 하였고 공영달(孔穎達)3)은 '군주의 사고(辭誥)의 법전'이라고 하였다. 사고(辭誥)란 군주가 내린 명령이나 포고를 아우르는 말이다. 대체로 보아 『서경』은 군왕과 대신 사이의 대화, 군왕에 대한 대신의 건의, 인민에 대한 군왕의 통고, 전쟁에 임하는 군왕의 맹서, 군왕이 신하에게 특권과 책임을 부과하는 명령 등 다섯 종류의 문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중국 고대사를 서술할 때 『서경』과 『시경』에서 자료를 많이 취하였다.

『서경』의 발생과 편찬

『서경』의 각 편은 누가 지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서경』의 각 편에는 서(序)가 있어서 각 편이 지어진 경위를 밝혀 놓았다. 공자가 이 서(序)를 지었다는 설이 있지만 훨씬 후대의 사람이 지은 듯하다. 『서경』을 엮은 사람도 사실 누구인지 모른다.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는 공자가 『상서』를 편정했다고 하였으며,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는 또 공자가 『상서』 1백 편을 엮었다고 하였다.4) 공자는 『서경』의 편찬이나 혹은 정리에 관여한 듯하지만, 반드시 1백 편으로 맞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대의 경서에는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의 차이가 있었다. 금문이란 당시 통행되던 예서(隸書)를 말하는데 그 예서로 쓰인 경전을 금문경(今文經)이라 한다. 고문이란 진나라 이전에 동쪽 지역에서 통행한 문자인데 - 이것은 왕국유(王國維)의 설이다 - , 그 글자체로 적힌 간독(簡牘)이 전한 때 집 벽에서 출토됨으로 써 민간에 전하였다. 이로써 금문경과 고문경의 어느 것을 택하느냐 하는 문제 때문에 논쟁이 일어났다.

현재 전하는 『상서』는 58편인데 25편은 고문(古文)이고, 33편은 금문(今文)이다. 서한 문제(文帝) 때 진(秦)의 박사였던 복생(伏生)이 벽 속에 감추어 두었던 29편을 얻어, 예서의 글씨체로 기록해 낸 것이 '금문상서'이다. 그것을 합하여 28편으로 만들고 다시 33편으로 쪼갠 것이 오늘날의 『상서』속에 들어 있는 '금문상서' 33편이다.

그러다가 한나라 경제(景帝) 때 노(魯)나라 공왕(恭王)이 공자의 옛 집을 허물다가 옛 글자체로 쓰인 '고문상서'를 얻었고, 한나라 무제 때 박사였던 공안국(孔安國)이 그 '고문상서'를 해독하니 모두 58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안국이 보았다는 『고문상서』는 전하지 않고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 즉 가짜 '고문상서' 25편이 전해졌다.

'위고문상서'라고 할 「대우모(大禹謨)」편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미하므로, 정밀하고 전일하여 중용의 도리를 견지하라"5)는 말이 있다. 송나라 때 진덕수(眞德秀)는 그것을 두고 "요ㆍ순ㆍ우가 전수한 심법으로, 만세 성학의 연원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16자 심전(心傳)'이다. 많은 학자들이 '위고문상서'를 가짜로 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청나라 염약거(閻若璩)가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이란 책을 지어 '고문상서' 25편이 위작이라고 판정하였다. 하지만 이 '위고문상서'도 진짜 '고문상서'가 아니라는 것뿐이고, 실제는 유교의 정치사상을 담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서경』은 대체로 보아 주나라가 들어선 뒤 무왕의 아들 성왕(成王)이 어려서 그 숙부 주공(周公)이 정치를 맡아볼 때 작성된 문서가 중심을 이룬다. 그 뒤 위로 올라가 은(殷)나라와 관련된 내용이 추가되고, 다시 그 위로 하(夏)나라, 다시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것 같다. 현재의 58편 가운데 '오고(五誥)'라고 일컬어지는 「대고(大誥)」, 「강고(康誥)」, 「주고(酒誥)」, 「소고(召誥)」, 「낙고(落誥)」 등과 「금등(金滕)」, 「자재(耔材)」, 「다사(多士)」, 「다방(多方)」 등이 맨 먼저, 주나라 초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부분의 글들도 아주 뒷날 전국시대 사람이 옛날에 대해 서술한 것인지 모른다. 우임금 때 각 지방의 토산물을 중앙에 납부하는 제도를 적은 「우공(禹貢)」은 춘추 말기에 지어졌다고 추정된다.

『서경』의 구성

『서경』은 어느 시대에 관련된 문건인가에 따라 크게 셋으로 나뉜다.

① 요순시절과 하나라에 관한 글
「요전(堯典)」 - 위고문본 「순전」 포함 - , 「고요모(皐陶謨)」, 「우공(禹貢)」, 「감서(甘誓)」, 「오자지가(五子之歌)」등. '우하서(虞夏書)'라고 부른다. '우'는 유우씨인 순임금을 가리키고 '하'는 하나라를 가리킨다.

② 은나라에 관한 글
「탕서(湯誓)」, 「탕고(湯誥)」, 「이훈(伊訓)」, 「태갑(太甲)」, 「고종융일(高宗肜日)」, 「서백감려(西伯戡黎)」, 「미자(微子)」 등. '상서(商書)'라고 부른다. '상(商)'은 은나라의 본래 이름이다.

③ 주나라에 관한 글
「태서(泰誓)」, 「목서(牧誓)」, 「홍범(洪範)」, 「금등(金滕)」, 「대고(大誥)」, 「강고(康誥)」, 「주고(酒誥)」, 「자재(籽材)」, 「소고(召誥)」, 「낙고(洛誥)」, 「다사(多士)」, 「무일(無逸)」, 「군석(君奭)」, 「다방(多方)」, 「입정(立政)」, 「고명(顧命)」, 「군아(君牙)」, 「여형(呂刑)」, 「문후지명(文侯之命)」, 「비서(費誓)」, 「진서(秦誓)」 등. '주서(周書)'라고 부른다.

요순시절과 하나라에 관한 글들을 모은 '우하서'는 하늘의 질서에 따라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관직을 두어 덕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하며, 군주와 신하가 서로 합심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서경』의 맨 처음에 실린 「요전」은 요임금이 정치를 행하고 순임금에게 선양(禪讓)6)한 사실을 차례대로 밝혔다. 곧, 요임금이 고위 관리를 임명하고 농경력(農耕曆)을 만들게 한 사실을 밝히고,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곤(鯀)을 발탁한 사실을 말하였으며, 순(舜)을 등용하여 정치에 시험한 뒤 선양하는 과정을 기술하였다. 그리고 순임금이 등극하여 각 지방을 시찰하고, 형법을 정하여 죄 있는 이를 벌한 사실과 요임금이 죽은 사실, 순임금이 고위 관리에게 자문하여 여러 관리들을 임명한 사실, 순 임금이 죽은 사실을 기록하였다. 한편 「고요모」에서는 덕 있는 사람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치와 종교가 합일되어 있던 시대였으므로 군주의 자질로 덕을 강조하고 왕위 계승의 중요성을 거듭 말한 것이다.

은나라에 관한 글들을 모은 '상서(商書)'는 군주는 천명을 받아서 올바른 정치를 하여야 한다는 정치 원리를 밝혔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이익과 편리를 주기 위하여 수도를 옮긴 사실을 적었다. 그리고 「고종융일」, 「서백감려」, 「미자」에서는 민심을 잃은 자는 천명을 상실하여 결국 나라를 잃게 된다는 것을 말하였다. 다시 말해 혁명(革命)이 있게 됨을 말하였다. '혁명'이란 '천명이 바뀐다'는 뜻이다.

주나라에 관한 글들을 모은 '주서(周書)'의 부분은 대개 일곱 가지 부류로 다시 나뉜다.

첫째, 정치원리를 제시하였다. 「홍범」은 오행설에 기초하여 정치질서를 바로잡고 복서(卜筮)의 신비적 수단을 이용해서 하늘의 뜻을 점쳐 상벌을 행할 것을 밝혔다. 「금등」, 「대고」는 군신 관계의 문란이나 내란 등을 경계하였다.

둘째, 지역의 여러 군주들과 관리들에게 경고하였다. 「강고」, 「주고」, 「자재」의 세 편은 지역의 여러 군주들과 관리들에게 천명과 왕명을 받들고 은나라의 선례와 문왕의 가르침에 따라 덕을 밝히고 일을 신중히 하며 백성을 보전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셋째, 새로운 도읍을 건설하는 이유를 밝혀 은나라 인사들을 다독였다. 「소고」, 「낙고」는 새로운 도읍을 건설하여 천명에 답한다는 사실을 선포하였고, 「다사」는 천명이 주나라에 있음을 밝히고 은나라 인사들을 회유한 내용이다.

넷째, 군주의 도리와 제후 및 관료의 직분을 제시하였다. 「무일」은 임금이 백성의 뜻을 좇아서 덕을 닦는 일을, 「군석」은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협력하여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을, 「다방」은 제후와 관료들에게 군주의 명령에 순종해야 함을, 「입정」은 유덕한 관리를 임용하여 형벌을 신중히 할 것을 밝혔다.

다섯째, 왕업 계승의 문제를 논하였다. 「고명」이 그 예이다.

여섯째, 형벌 제도를 다루었다. 곧, 「여형」은 명덕(明德)ㆍ신벌(愼罰)을 논하였다.

일곱째, 춘추시대에 들어와서도 왕도가 행해졌음을 말하였다. 「비서」, 「문후지명」, 「진서」의 세 편은 춘추시대에 왕도가 행해졌음을 밝혔다.

요(堯)임금의 모습

순(舜)임금의 모습

역사적 문건이자 정치 강령의 책인 『서경』

『서경』은 역사적 문건이다. 특히 주나라의 성립 및 발전과 매우 관계가 깊다. 주나라 성립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글은 '주서' 가운데 「태서(泰誓)」이다. 상ㆍ중ㆍ하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편은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紂)를 토벌할 때 신하들과 맹세한 말을 실어두었다.

무왕은 부친 문왕이 죽은 뒤 상중에 있었지만 천명이 주나라에게 있다고 선언하고 은나라의 주(紂)를 정벌하러 나섰다. 이때 고죽국의 왕자였던 백이(伯夷)와 숙제(叔弟)가 "부친이 죽어서 아직 장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전쟁을 벌인다면 효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신하의 신분으로 군주를 시해하면 어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말렸다. 하지만 무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은나라를 멸망시켰고,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살다가 굶어죽었다. 주나라가 정권을 잡을 때 선양(禪讓)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무력을 사용한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서경』의 여러 편들은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정당성을 선언하고 있는데, 「태서」 상편에서는 혁명의 이념을 다음과 같이 밝혀 놓았다.

하늘이 백성들을 도우시어 군주를 만들고 스승을 만드심은 능히 상제를 도와 사방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편안하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따라서 죄 있는 자를 토벌하고 죄 없는 자를 용서함에 내 어찌 감히 그 마음을 잘못 가질 수가 있겠는가. 힘이 같을 경우에는 덕을 헤아리고, 덕이 같은 경우에는 의리를 헤아리겠다. 수(受)7)는 신하들이 만억이지만 마음이 만억으로 각기 다르다. 하지만 나는 신하가 고작 삼천 명이지만 마음은 한 마음이다.

'주서'에 들어 있는 「목서(牧誓)」는 주나라 무왕이 주(紂)를 치러 갈 때 목야(牧野)라는 곳에서 군사들에게 맹세한 내용이다. "갑자일 동틀 무렵에 왕이 아침에 상나라의 국경인 목야(牧野)에 이르시어 군사들에게 맹세하니, 왕이 왼손에는 황금 도끼를 잡고 오른손에는 흰 깃발을 들고서 휘두르며 말씀하셨다"로 시작한다. 맹세의 어투는 매우 당당하다.

옛 사람의 말에 "암탉은 새벽에 울지 말아야 하니,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였다. 지금 상왕 수(受)가 부인의 말을 따라 혼미해서, 지내야 할 제사를 버려 보답하지 않으며, 남기신 왕부모의 아우들을 버려 도리로 대우하지 않고, 사방에 죄가 많아 도망해온 자들을 높이고 우두머리로 삼으며 믿고 부려서, 그들로 대부와 경사를 삼아 백성들에게 포악하게 하고 상나라 읍에서 갖은 몹쓸 짓을 한다. 이제 나 발(發)은 공손히 하늘의 벌을 행하니, 오늘의 싸움은 6보와 7보에서 머물러 대오를 가지런히 하라. 군사들은 힘쓸지어다. 진격해서 4벌, 5벌, 6벌, 7벌을 하고는 일단 머물러 진용을 갖추어라. 힘쓸지어다, 군사들아! 부디 굳세게 용맹을 떨쳐 범과 같이 비휴와 같이, 곰과 같이 큰 곰과 같이 상나라 국경으로 진격하라. 도망하는 자들을 맞아 싸우지 마라. 이로써 서쪽 제국을 위해 역군이 되라. 힘쓸지어다, 군사들아! 너희들이 힘쓰지 않으면 너희들 몸에 죽음이 있을 것이다!

『서경』은 정치 강령의 책이다. 『서경』은 곳곳에서 군주의 덕치(德治)를 강조하였다. '주서'에 들어 있는「무일(無逸)」은 대표적인 글이다. 이 글은 주공(周公)이 조카 성왕(成王)에게 안일에 빠지지 말라고 경계한 내용이라고 전한다. 옛날부터 국가를 차지한 군주들은 모두 근(勤)으로써 나라를 일으키고, 일(逸)로써 폐하고 말았다는 훈계를 담고 있다. 성왕이 처음 정치를 행하게 되었을 때, 그가일(逸)은 알아도 무일(無逸)은 모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주공이 이 글을 지어 훈계하였다고 한다. 그 일부를 보면 이러하다.

군자는 편안하게 지내서는 안 된다. 먼저 밭 갈고 농사짓는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의 고통을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무일(無逸)'은 곧 노동의 체험을 중시한 말이다. 이 말은 중국에서 1950년대 문화대혁명이 있었을 때 하방운동(下方運動)8)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또한 『서경』은 '명덕신벌(明德愼罰)'과 '애민중민(愛民重民)'의 정치 사상을 말하였다. '명덕신벌'은 본래 군주 자신이 지켜야 할 계명이었다. 하지만 뒷날에는 제왕들이 지켜야 할 규범으로 되었다. 형벌 제도를 다룬 「여형」에 그 구체적 내용이 밝혀져 있다. '애민중민'의 사상은, 정치를 할 때 백성들을 근본으로 여기고 백성들의 삶을 질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질고 현명한 관료들을 임명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서경』의 '명덕신벌'과 '애민중민' 사상은 유교 민본주의 사상에 기초를 이루었다.

민본주의를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은 앞서 인용한 '민유방본(民惟邦本), 본고방녕(本固邦寧)'이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라는 말이다. 「오자지가(五子之歌)」에서 우임금의 유훈(遺訓) 가운데 제1조로 들고 있는 내용이다.

또한 '주서'의 「진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만약 한 신하가 성실하여 다른 기예가 없으나 그 마음이 곱고 고와서 마치 용납함이 있는 듯하여, 남이 가지고 있는 기예를 자신이 가진 것처럼 여기며 남의 훌륭하고 성스러움을 마음으로 좋아하기를 입에서 나오는 것뿐만이 아닌 것처럼 한다면 이는 남을 포용하는 것이다. 나의 자손과 백성들을 보호할 것이며 또한 일을 맡음에 보탬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군주가 어진 관료를 임명하여 백성들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사상을 담은 것이다.

또 '주서' 「군아」에는 "여름은 본래 덥고 비가 많은 철이거늘, 그런데도 인민은 원망하고 한숨지으며, 겨울은 본래 대단히 추운 철이거늘, 그런데도 인민은 원망하고 한숨짓는다"고 하여, 관료가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를 잘 살펴야 한다고 경계하였다. 「군아」는 주나라 목왕(穆王)이 백성의 일과 교육의 일을 담당하는 관직에 군아라는 신하를 임명할 때 명령을 내린 글이라고 한다.

한편, 『서경』 전체에서 정치 철학을 논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주서'의 「홍범」이다. 이 글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복한 뒤 은나라의 현자 기자(箕子)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기자가 질문에 답한 사실을 적은 것이라고 한다. 기자는 은나라의 왕족으로서 주왕(紂王)에게 간언하다가 투옥되어 있었다. 당시 기자는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강령을 일러 주었다 한다. 홍범구주는 유가사상의 정치ㆍ도덕적 범주를 망라한 것이다. 서양의 카테고리를 '범주'라고 번역하는 것은 바로 『상서』의 홍범구주에 의한 것이다.

홍범구주(洪範九疇)

홍범 구주의 내용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1) 5행(五行) : 수, 화, 목, 금, 토. 의식주 생활 수단에 이바지하는 자연적 물질.
(2) 공경스럽게 5사(五事)를 행한다 : 모(貌), 표(表), 시(視), 청(聽), 사(思) 등 개인적인 수양의 내성적 계기.
(3) 두텁게 8정(八政)을 행한다 : 식(食), 화(貨), 사(祀), 사공(司空), 사도(司徒), 사구(司寇), 빈(賓), 사(師) 등 나라 일을 나누어 맡은 각 반.
(4) 화합하는 데 5기(五紀)를 쓴다 : 세(歲), 월(月), 일(日), 성진(星辰), 역수(曆數) 등 천문과 달력에 의한 경륜.
(5) 세움에 황극(皇極)을 쓴다 : 왕도의 극치를 보이며, 중앙에 위치하는 범주.
(6) 다스림에 3덕(三德)을 쓴다 : 정직(正直), 강극(剛克), 유극(柔克) 등의 세 가지 통치방법.
(7) 밝힘에 계의(稽疑)를 쓴다 : 복서(卜筮), 즉 점 치는 방법.
(8) 생각함에 서징(庶徵)을 쓴다 : 우(雨), 양(暘=晴), 욱(燠=暑), 한(寒), 풍(風), 시(時=調和) 등의 천기를 보는 방법.
(9) 누리고 삶에 5복(五福)을 쓰며, 두렵게 함에 6극(六極)을 쓴다 : 5복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말한다. 6극은 흉단절(凶短折 — 흉은 7세 전의 죽음, 단은 20세 전의 죽음, 절은 30세 전의 죽음 —), 질(疾), 우(憂), 빈(貧), 악(惡), 약(弱)을 말한다.

『서경』과 우리 문화

속설에 중국 은(殷)나라의 기자가 단군을 이어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하여, 우리 선조들은 『서경』 가운데서도 「홍범」을 매우 중시하였다. 오늘날 보기에는 중국의 역사 자료도 모순되고 시대가 맞지 않아 기자조선 자체가 부정되고 있다.
그런데 『서경』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우리 지식 계층의 필독서였다. 신라 청년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학업의 성취를 약속한 내용을 새긴 임신서기명석(壬申誓記銘石)이 있다. 거기에 새겨진 글을 보면, 신라 젊은이들은 『시경』ㆍ『예기』ㆍ『춘추전』과 함께 『서경』을 필독 도서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서경』은 유교 정치의 이념을 담은 책으로서 매우 귀중하게 취급되었다. 특히 정치 이념을 논하거나 행정 방안을 제시하는 상소문에서는 이 『서경』이 자주 인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영조 임금은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고는 후회하는 뜻으로 "동혜동혜(桐兮桐兮), 혈삼혈삼(血衫血衫), 숙시금등천추(孰是金藏千秋). 여회망사지대(予悔望思之臺)"라는 사(詞)를 지어 금등(金縢)에 넣어두었다고 한다. "오동 궤짝이여 오동 궤짝이여, 피묻은 적삼이여 피묻은 적삼이여. 누가 금등에 넣어 천추토록 보관하는가. 나는 망사대의 일을 후회하노라"는 뜻이다. 금등이란 왕실의 비적(秘籍)을 간직해 두기 위해 엄중하게 봉한 궤를 말한다. 그런데 이 금등이란 말은 바로 『서경』의 편명이기도 하다. 곧, 주나라 초에 무왕의 병이 위중해지자 주공(周公)이 형 대신 자기를 죽게 해달라고 조상들에게 빌었던 기도문을 글로 써서 금실로 묶은 상자속에 넣어 봉해 두었다고 한다. 뒤에 주공은 성왕을 도와 섭정을 할 때 정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았으나 금등의 글이 나와 성왕이 감동하여 오해를 풀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고사 성어나 명구도 『서경』에서 나온 것이 많다. 임금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를 고굉지신(股肱之臣)이라고 한다. 다리와 팔뚝에 비길 만한 신하라는 뜻인데, 「익직(益稷)」편에 나온다. 곧, 순임금이 신하들을 둘러보며 "그대들과 같은 신하는 짐의 팔다리요, 눈과 귀로다. 내가 백성을 교화시키고 돕고자 하니 아울러 그대들도 도와주시오"하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지방의 서원이나 양반집에 보면 '긍구(肯構)'라든가 '긍당(肯堂)'이라는 말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서경』의 「대고(大誥)」에서 나왔다. 「대고」는 주나라 성왕이 점을 쳐서, 은나라의 반란군을 토벌하려는 뜻을 고하고 천명이 불변함을 주장한 내용이다. 그 가운데 정치를 집짓는 일에 비유하여, "만약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이미 땅을 다지는 법을 정해 두었거늘, 그 아들이 당(토대)을 만들려고도 하지 않고, 하물며 가옥을 지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그 아버지가 '내게 좋은 후계자가 있어서 나의 계획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후 뒷날 '긍구긍당(肯構肯堂)' 이라고 하면 조상의 유업을 잇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원이나 양반집에 그런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

『서경』은 본래 중국의 상고시대에 정치적 사실을 적은 문건을 토대로 정치 이념을 밝힌 고전이었다. 보편적인 문화를 지향하였던 과거의 우리나라도 『서경』을 통해서 정치 이념을 세우고, 또 문화의 여러 방면에서 그 정신을 반추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서경』의 한문이 어려운 이유는?
『서경』의 한문은 정말 어렵다. 그 이유는, 평범한 서술이거나 감정의 흐름에 따라 적은 글이 아니라, 정치 문서들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문서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글자 표기가 일상적인 표기와 달랐던 것 같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건의 흐름과 정치 철학의 대강은 매우 선명하므로, 글의 흐름은 어렵지 않다.

2. 『서경』 가운데 관리나 정치가로서의 품성에 대해 강조한 내용이 있는가?
요(堯)임금 때의 법관이었던 고요(皐陶)가 뒷날 우(禹)임금에게 한 말이 있다. 「고요모」편에 나오는데, 아홉 가지 덕목을 내세운 내용이어서 구덕(九德)이라고 한다. 관대하면서도 엄격할 것, 부드러우면서도 꿋꿋할 것, 진실하면서도 공손할 것, 일을 잘 처리하면서도 삼갈 것, 잘 순응하면서도 굳셀 것, 곧으면서도 온화할 것, 대범하면서도 모남이 있을 것, 과단성이 있으면서도 독실할 것, 강하면서 의로울 것 등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정약용(丁若鏞)은 이 아홉 가지 덕목이 곧, 당시 인재를 선출하던 기준이라고 보았다.

3. 『서경』의 본문을 깊이 이해하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
주해본으로는 '십삼경주소' 가운데 『상서주소(尙書注疏)』에 들어 있는 『공안국전(孔安國傳)』(13권)을 읽어야 한다. 이것은 실은 공안국이 집필한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알려져 왔으므로 '위공안국전(僞孔安國傳)'이라고 하여 '위(僞)'자를 붙여 말한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갑골문ㆍ금문이나 기타 사료를 이용하여 『상서』를 논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굴만리(屈萬里)의 『상서석의(尙書釋義)』는 새로운 설을 많이 채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책들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각주

1) 왕국유(1877~1927)는 청(淸)나라 말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활동한 중국의 학자로서 고증학의 계승자이면서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의 철학을 중국에 소개한 신학문 연구가였다. 1911년의 신해혁명 이후 일본 교토(京都)로 피신하여, 교토 대학의 나이토 고난(內藤湖南)과 가노 나오키(狩野直喜) 등과 교류하였다. 귀국하여 청화대 국학연구원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족 출신이면서도 변발을 고집하며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의 스승으로 청조의 부활을 꿈꾸다가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북벌군이 베이징(北京) 점령에 나서자 북경 이화원(頤和園)의 곤명호(昆明湖)에 투신하였다. 그가 남긴 60여 종의 저서는 중국의 철학, 미학, 문학, 역사학, 고고학, 언어학, 갑골학, 금석학 분야에서 모두 고전으로 남아 있다. 전통 학술의 연구방법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갑골문자나 목간 등 신출 자료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논문집 『관당집림(觀堂集林)』이 저명하다. 정치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량치차오(梁啓超), 루쉰(魯迅), 궈모뤄(郭沫若) 등이 그를 중국 근대가 낳은 천재로 꼽았다.
2) 서구에서는'Document Classic' 혹은 'Book of Document'라는 번역 명을 사용한다. 영역본으로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理雅各, 1815~1897)의 번역이 유명하다. 레게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성직자이지만, 중국학 학자로서 더 유명하다. 말라카(Malacca)와 홍콩에서 선교사와 교육자로서 34년을 봉사하고 1875년에 은퇴하였다. 그는 1863년 홍콩에 거주하면서 중국인 학자 왕도(王韜, 1822~1897)와 함께 중국학을 연구하였다. 그 뒤 영국 옥스포드 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있었다.
3) 공영달(574~648)은 당(唐)나라 때의 학자로 자(字)는 충원(沖遠)이다. 수(隋)나라의 학자 유작(劉焯)의 제자이며 당나라 태종(太宗)의 명으로 안사고(顔師古), 왕공(王恭), 사마재장(司馬才長), 왕염(王琰) 등과 함께 오경(五經)의 훈의(訓義)를 편찬했다. 180권의 책이 완성되자 태종이 『오경정의(五經正義)』라고 이름 지었다.
4) 『상서정의(尙書正義)』에 인용된 『선기검(璿璣鈐)』에서는, 옛날에 『서』가 3,240편이었는데 공자의 산정을 거쳐 120편이 되었으며, 그 가운데 102편은 『상서』이고 18편은 『중후(中侯)』라고 하였다.
5) 사실 이 '인심유위(人心惟危), 도심유미(道心惟微)'는 『순자』의 「해폐(解蔽)」편에서 따왔고, '윤집궐중(允執厥中)'은 『논어』에서 따온 것이고, '유정유일(惟精惟一)'은 조작된 말이라고 한다.
6) 덕 있는 이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7)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다.
8) 고위 간부ㆍ지식인들을 자신의 직위보다 낮은 곳이나 변방에 근무토록 하여 관료주의화를 막고자 했던 정책이다.

 

출처 : 명작감상 문화여행
글쓴이 : 종 지 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