걍~태수 2013. 11. 20. 22:01

생명 탄생의 신비를 은유하는 집 - 서산부인과
한 생명이 꿈틀거린다. 태어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한다. 산부인과는 매일 수많은 우주가 시작되고 영원하면서 강렬한 생명력이 모인다. 이러한 속성을 어떻게 건물에 표현할 수 있을까? 한국 건축을 대표하는 거장 김중업은 생명의 원천인 자궁, 그리고 태아의 이미지로 그 생명력을 구현해냈다. 그 속성을 물려받았는지 건물은 계속해서 쓰임새는 바뀌었지만 뚜렷한 존재감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서울 명동에서 신당동 쪽으로 퇴계로를 따라가다 보면 광희문 맞은편에 쳐다보지 않을 수 없는 묘한 건물이 나타난다. 동글동글한 덩어리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외계에서 온 우주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글동글 곡선만으로 이뤄진 모습을 보면 네모반듯한 사무실 건물일 리가 없을 듯한데, 큰길가에 지은 것을 보면 가정집일 리도 없다. 송이버섯들을 탑처럼 쌓은 구조물이 뭘까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발코니란 것을 알게 되고, 그다음에는 다른 어느 한 곳 특별하지 않은 구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일반인들에겐 ‘한국에도 이런 건물이 있었나?’ 싶게 만드는 건물이자, 그 정체를 아는 건축 전공자들에겐 아련한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이 건물이 건축가 김중업(1922∼1988)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서산부인과’다.



한국 건축을 대표하지만 다른 길을 걸었던 김중업과 김수근
20세기 한국 정치에서 김종필-김영삼-김대중 세 거물 정치인이 운명적으로 경쟁했던 ‘3김시대’가 있었다면, 20세기 한국 건축에선 김중업-김수근 두 거물 건축가들이 당대를 호령했던 ‘양김시대’가 있었다. 두 사람은 1960년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 거의 한 세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 건축을 대표했다.
그러나 그 인생 역정은 사뭇 달랐다. 인간관계에 능수능란했던 김수근(1931∼1986)은 한국 개발 독재기 가장 정권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건축가였고 덕분에 많은 과실을 딸 수 있었다. 반면 김중업은 그렇지 못했다. 김수근 못잖게 유명했지만 독특하고 괴팍하고 오만한 성격 탓에 주변 사람은 적었고, 돌출적인 존재로 평생을 보냈다. 박정희 정권의 도시계획에 비판적이어서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하기도 했다.
작품을 봐도 김수근이 설계한 수많은 국가적 프로젝트 건물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지만 김중업의 것들은 쉽게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말년의 대표작이지만 미학적 평가는 좋지 못한 88 서울올림픽 기념 조형물 ‘평화의 문’과 부산 ‘충혼탑’ 같은 조형물, 그리고 한때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유명했던 서울 청계천 3·1 빌딩과 서강대 본관 정도가 남아있다.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서울 주한프랑스 대사관은 개방을 하지 않아 일반인들은 보기조차 어렵고, 그의 초기작으로 콘크리트를 유기체처럼 빚어낸 특별한 형태로 유명했던 제주대 본관은 건축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바닷바람 탓에 건물 상태가 나빠져 1996년 철거되어 사라졌다.



유기적으로 흐르는 듯한 독창적이고 부드러운 김중업의 건축 세계
제주대 본관은 건축계에서 사라지게 된 것을 가장 안타까워하는 김중업의 주요작이었다. 콘크리트를 진흙 주무르듯 유기적이고 곡선형으로 설계해 마치 SF 영화에 나오는 미래의 건축물 같았던 이 건물은 다른 건축가들에 견줘 유독 조각 작품 같은 형태의 건물에 집착했던 김중업 건축의 특성, 그리고 20세기 현대 건축의 중요한 흐름을 반영한 건물이었다.
김중업의 스승은 파격적이고 추상적인 건축으로 세계 건축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르코르뷔지에였다. 비록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르코르뷔지에 사무실에 머물렀지만 김중업은 스승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처럼 콘크리트의 미학을 추구했다. 돌이나 나무와 달리 건축가가 원하는 형태대로 자유롭게 빚어낼 수 있는 콘크리트의 특성을 활용해 그는 곡선이 물결치고 구조물이 덩굴 식물처럼 휘감기는 건축을 시도했다. 그 대표작이 바로 제주대 본관이었다.
제주대 본관은 헐려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아 김중업의 독창적이고 곡선이 중심이 되는 건축 미학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 1965년 작인 서산부인과다.



생명의 은유를 닮아 유명한 건물
이름 그대로 산부인과 병원 건물로 지어진 이 건물은 그 운명이 기구했다. 여러 번 용도가 바뀌어 때론 간판이 덕지덕지 붙어 외관을 가렸고, 용도가 바뀔 때마다 페인트를 새로 칠해 색깔이 수도 없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그 형태는 비교적 온전히 남아 지금은 디자인 회사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한때 난삽하게 붙었던 간판이 사라지면서 건물의 특성은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도 서산부인과는 건축계에서 ‘특별한 메타포를 담아낸 집’으로 유명하다. 유기체들이 모인 듯한 외관이 어떤 생명체를 연상시키기는 하지만 실제 겉으로 볼 때 특정 대상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는 없다. 그러면 왜 이런 말이 나온 것일까?
건물 설계 도면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평면으로 잘라 본 서산부인과의 모습을 보면 어린 아이가 태어나는 산부인과라는 공간을 의미하는 형상들이 들어있다. 내부 공간을 사각형 벽이 아니라 동그란 원형 벽으로 구획했는데, 왼쪽 내부 공간 단면은 생명을 잉태시키는 남성성의 상징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아래쪽의 원형 공간의 단면은 어머니 뱃속에 웅크리고 있는 태아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서산부인과 도면
서산부인과 도면

자궁과 태아의 이미지로 강렬한 생명력을 표현하다
건축가들은 인간에게 가장 아늑하고 가장 따듯한 공간의 원형을 ‘모태 공간’, 곧 자궁에서 종종 찾고자 한다. 동시대 김중업의 라이벌이었던 김수근 역시 이런 공간을 늘 추구하고자 했다. 건물 내부에 자기 혼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타원형 작은 방을 만들기도 했고, 자궁을 연상시키는 이미지의 그림을 많이 그리기도 했다.
김중업은 아예 이 건물이 생명이 탄생하는 ‘산부인과’라는 점에서 자손을 이어가기 위한 인간의 생식 기관들, 그리고 태아의 이미지로 구현했다. 이런 이미지가 모인 건물 전체는 절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이런 연상 작용의 힘이 임자가 바뀌고 쓰임새는 바뀔지언정 이 건물의 형태를 계속 유지하도록 만드는 게 아닐까.

서산부인과 모형
서산부인과 모형

어느새 반세기 역사가 쌓였음에도 이 건물이 내뿜는 특별한 힘은 세월을 거스르며 강렬하게 사람들을 자극한다. 원래 산부인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시민들은 이 건물을 보면서 많은 상상을 한다. 누구는 군사 기지를, 누구는 갤러리를, 그리고 또 다른 이는 직선적이고 절제된 모더니즘 이후 파격적인 디자인을 시도했던 포스트 모던 계열의 건물을 연상한다. 한국 현대건축에서 이처럼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건물은 지금껏 찾아보기 어렵다.

사진 | 구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