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야기/건축이야기
-건축계의 어두운 뒷골목- ㆍ‘공공건축 죽느냐 사느냐’ 수주 방식 수술에 달렸다
걍~태수
2013. 6. 5. 10:56
[건축과 삶](Ⅲ-5) 건축계의 어두운 뒷골목
ㆍ‘공공건축 죽느냐 사느냐’ 수주 방식 수술에 달렸다
전화벨이 사납게 울린 것은 아침 7시쯤이었다. 가뜩이나 아침잠이 많은 필자는 기겁하며 놀라 깨었다.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저는 ○○회사의 △△과장입니다. 이번 □□현상설계 공모에 참여하고 있는데 오늘이 심사일입니다. 혹시 교수님께서 심사자로 참여하시는지요?” 아닌데요. “네, 알겠습니다.” 뚝. 이게 무슨 일인가. 아침잠을 빼앗긴 황망함으로 잠시 ‘멘붕’ 상태를 겪었다. 만약에 “아, 딱 맞히셨네요, 심사에 참여합니다”라고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면 그 다음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라면박스’를 차 트렁크에 싣고 기다린다는 말이 떠돌기도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 ‘운찰’이라 불리는 공공건축물 입찰
지난주에 건축가가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 썼으므로 이번에는 이들의 생업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먼저 앞 상황에 대한 용어 정리부터. ‘현상설계’란 설계경기, 혹은 ‘콤페(competition)’라고도 부른다. 일정 규모 이상의 공공건물을 신축할 때 해당 자격을 갖춘 건축가들의 작품을 제안받은 뒤, 심사를 통해 당선자를 뽑아 본 설계를 의뢰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그 아침, 필자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현상설계에 작품을 제출한 업체의 직원으로 아마도 수십명에게 같은 내용으로 전화를 걸고 있을 터였다. 행인지 불행인지 필자는 심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아마 그 담당자는 심사위원을 찾아서 바쁘고 뜨거운 아침을 보냈을 것이다.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일이 실력으로만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 안타까움과 의아함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위의 현상설계는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경우이고, 민간 건축시장에서 설계자를 선정하는 과정은 개인적인 친분이나 혹은 건축주의 선호에 따라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누구든 마음에 드는 화가의 작품을 구매하여 내 집에 걸 수 있듯이 대지와 자금을 가진 건축주는 자기 의사에 따라 건축가를 지명하여 설계를 의뢰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이러한 민간 설계 시장이 아니라 행정부나 지자체, 혹은 LH나 SH공사 등 각 공기업에서 발주하는 건축물의 용역과 수주 과정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수년 전부터 민간 건축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이제 건축계의 숨통을 틔워줄 영역은 이 공공건축 분야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공공건축물은 그 규모나 설계비 또는 사업의 안정성에 있어서 현업의 건축가라면 누구나 수주하고 싶은 프로젝트이며 그 여부에 사무소의 명운이 걸리기도 한다. 이러한 공공건축물 설계의 발주는 정부가 정한 틀에 따라 이루어진다.
용역비 총액이 2000만원 미만의 소규모 공사는 수의계약을 통해 자격에 맞는 업체를 선정하게 된다. 각 발주기관의 재량에 맡기는 범주이므로 논외로 하자. 이보다 규모가 커져서 총 공사비가 20억~30억원 정도가 되면 ‘입찰’의 과정을 밟게 된다. 발주처가 공지한 과정에 따라 일정한 자격 이상의 업체에서 입찰가격을 제출하면 임의적으로 선정된 예정가격 이상을 써낸 자 중 가장 최저가를 제출한 업체를 용역자로 선정하는 방식이다. 설계자 선정 과정에서의 사회적 비용의 소모와 비리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없앨 수 있다는 점에서 중·소규모의 공공건축 공사에 채택되고 있다. 문제는 설계안의 제안이나 기술적 심사 과정 없이 순전히 ‘운’에 따라 설계자가 선정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운찰’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입찰과정만을 반복하여 선정되면 하도급을 통해 공사를 넘기고 중간 이윤만 챙기는 소위 ‘페이퍼 컴퍼니’가 버젓이 활동하기도 한다.
동사무소, 마을회관, 공립유치원이나 지역의 소규모 도서관 등 시민이 실생활 가까이에서 누리는 건축물들의 상당수가 이 같은 ‘운찰’ 방식에 의해 설계되고 지어진다. 규모는 작지만 시민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규모의 건축물이 아무런 질적 평가과정 없이 세워짐으로 인하여 공공공간의 질이 떨어지거나 시민의 생활이 불편해지고 부실 공사에까지 이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입찰 제도가 지닌 효율적 측면은 살리되 이러한 과정으로 지어진 공공건축물의 질에 대하여 시민이나 공공의 전문가에 의한 사후 평가를 실시하여 입찰자격을 제한하거나 가산점을 주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최저가를 선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안의 질을 평가할 수 있는 제도 역시 도입될 필요가 있다.
■ 현상설계 심사가 투명해야 하는 이유
입찰의 규모보다 좀 더 큰 건축물이나 혹은 발주처에서 사업의 성격상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글머리에서 언급한 현상설계 경기를 통하여 건축물의 설계자를 선정하게 된다. 그 설계비가 몇 억원, 혹은 10억원을 훌쩍 넘기도 하니 설계사무소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일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현상 설계에 응모 작품을 제출하기 위해서는 사업 규모가 작은 경우라도, 외주업체의 힘을 빌려야 하는 투시도, 조감도 등의 작업비용을 포함하여 최소 2000만~3000만원에서부터 1억원을 훨씬 넘기는 자금과 1~2개월 이상의 시간이 투여되어야 한다. 이렇게 힘을 쏟아부은 현상경기에서 실패하게 되면 사무실의 운영에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업계에서는 이를 타율로 말하기도 하는데, 서너 차례 계속 아웃을 당하게 되면 회생불능의 상태에 빠지고야 만다. 급기야 의욕 넘치던 젊은 건축가들에게서 ‘사무실 접었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공정한 경기에서 헛스윙으로 아웃을 당하는 것이야 실력의 차이이니 매정하더라도 연습을 더 하든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으라 하겠지만 심판이나 판정의 룰이 공정하지 않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얼마 전까지도 가끔 필자의 연구실 복도에서 낯선 분들을 뵙곤 했다. 대개 공공건축물 현상설계와 관련되었는데, 참가업체의 직원들이 심사를 앞두고 찾아오는 것이었다. 명함만 주고받은 뒤 배웅하는 것이 내 나름의 처신이었는데, 선후배의 인연이 닿는 경우도 있어 참으로 난처한 때가 많았다. 잠시 이 지면을 빌려 사과드린다. 지역별로 배정된 직원들이 거의 모든 대학의 건축계획 관련 교수를 방문하는 것이니 이처럼 불필요한 낭비가 없다. 이 분들을 맞아야 하는 교수들도 고역이요, 억지 춘향으로 교수 연구실 문을 두드려야 하는 담당자들의 고충이야말로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그 와중에서 일어나는 불미한 일들도 상당할 것이다. 이러한 설계 외적인 일에 시간과 자금을 낭비할 여력이 없는 소규모의 사무소나 젊은 건축가들에게 현상설계는 그야말로 연전연패,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최근에 이르러 현상설계의 심사를 공정하고 공개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어 다행이다. 작년 말, 서울시 SH공사에서 발주한 고덕강일 보금자리 주택지구 현상설계에서는 심사위원을 사전 공지하고 심사가 끝난 후 모든 심사위원의 채점 집계표를 공개했다. 한결 심사가 공정해졌다는 후문이다. LH공사도 심사위원 및 심사결과의 공개를 시작하고 있다. 강남구는 수년 전부터 현상설계경기 심사의 전 과정을 강남구청 인터넷 방송국을 통해 생중계해 온 바 있다. 어린이집이나 노인복지관 등 관내의 현상설계경기에 있어 등록된 전문가들 중에서 심사 당일 주민 대표의 추첨으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진행되는 심사의 전 과정을 공개하여 투명하고 공정한 심사를 유도하였다. 장막 뒤에서 ‘그들끼리’만 나누던 이야기를 시민 모두에게 투명하게 내보인 것이다. 멋진 발상이다. 보는 눈이 많다면 심사가 보다 공정해지는 것이야 당연하다.
앞의 사례들과 같이 심사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은 심사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법정에서의 재판도 이해당사자, 혹은 관심 있는 사람들이 누구나 방청객으로 참석하여 모든 과정을 지켜보지 않는가. 이는 헌법에 규정된 ‘재판 공개의 원칙’으로, 국민에게 심판의 방청을 허용함으로써 법원의 절차를 국민의 감시하에 두어 사법의 공정성을 보장하려는 데 있다. 또한 판결문과 함께 재판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 추후에도 열람이 가능하다. 이러한 공개와 기록의 원칙은 판결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다. 건축설계경기에서도 ‘심사 공개의 원칙’이 도입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해 당사자인 참여 업체와 시민의 참관을 허용하고 온라인에서의 생중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공개 심사가 마뜩지 않은 위원이라면 심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오늘도 현상설계경기에서 영문도 모르는 채 아웃당하여 쓴 소주를 붓고 있을 우리 젊은 건축가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 중소 업체 숨통 죄는 ‘턴키’ 방식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 지난해 말 서울시는 300억원 이상의 대형공사에 관행적으로 적용되던 턴키발주를 원칙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턴키’란, 시공자가 사업의 시작부터 건축 설계와 시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서비스를 조달, 완료하여 제공함으로써 발주자는 열쇠만 돌리면(turn-key) 바로 건축물의 사용이 가능해진다는 사업 방식이다. 이 방식은 그동안 공사기간 단축, 책임소재 일원화 등 장점이 있어 지하철 및 도로공사, 대형 건물의 신축 등 대규모 공사에 주로 적용해 왔다.
턴키 공사 사업자의 선정과정 역시 현상경기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를 둘러싸고 비리와 담합 등이 일어나거나, 중소 업체의 참여가 사실상 어려워지는 등의 부작용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수많은 원성을 들어왔다. 또한 건설사들에서 대형 사업의 수주를 위하여 교수가 중심이 된 심사위원 후보들을 소위 ‘관리’해 온 것도 업계의 공공연한 이야기다. 얼마 전까지 턴키 설계 심의에 있어 전국 3000명 이상의 전문가 풀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였는데 건설업체는 누가 평가위원이 될지 몰라 평소에도 전방위 관리를 해 왔다. 대형 건설사에는 이런 관리에 투입되는 영업사원만 수백명에 이를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 사정이 이러하니 상위 10개 정도의 대형 건설사가 턴키 사업의 95%를 가져가는 것이 이상할 리 없다. 이와 같이 부작용이 심각해지자 2009년 국토해양부는 평가위원 풀을 전국 수천명에서 기관별 50~70명 정도로 축소하고 위원명단을 사전 공개하도록 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건설사들의 로비 대상을 줄인 것일 뿐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시의 결단은 매우 긍정적이다. 우선 설계와 시공이 분리 발주됨으로써 건축설계의 자율성이 보장될 가능성이 현저히 높아졌다. 턴키 방식하에서는 용역 규모에 있어 압도적인 부문을 차지하는 대형 건설사가 사실상 건축설계사무소를 쥐락펴락해 왔다. 턴키 현상설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건설사의 입장을 따르지 않는 건축가가 퇴출되고 보다 통제가 쉬운 다른 건축가로 대체되기도 한다. 건축이 건설사에 의해 검열당하는 이러한 상황에서 작품성을 갖춘 독창적 계획안이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서울시청 역시 턴키 방식으로 건립되었다. 건축설계안은 수차례 수정되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 이상한 형태에 책임을 질 건축가가 누구인지 확정하기도 힘든 판국이 되어버렸다. 서울시청의 디자이너로 알려진 건축가 유걸조차 “내가 서울시청을 설계한 건축가인가”라고 되묻고 있다. 이어 그는 말한다. 시공자가 리더가 되어 설계와 시공을 지휘하는 턴키 현상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고, 그 이유를 서울시청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이 존경받아 온 건축가에게 괴기스러운 디자인의 책임을 씌워버린 것은 턴키 제도의 모순에 기인한다. 이러한 참혹한 실패로부터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펜과 컴퓨터 대신 망치와 레미콘으로 건축 디자인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창의적이고 시민과 호흡하는 건축을 위하여
서울시의 확약대로 건축설계 과정이 건설사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보다 창의적인 작품의 제안이 가능해질 것이며 건축가들이 사회와 소통하며 작품의 공공적 성격을 실현할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될 것이다. 서울시는 아울러 심의과정을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통해 중계하고 그 과정 및 결과도 시의 홈페이지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앞서 말한 심사 공개의 원칙이 바야흐로 실현될 조짐이다. 두 손 들어 환영한다! 서울시의 이러한 노력은 투명하고 공정한 건축 시장의 실현을 위한 뜻깊은 한걸음이 될 것이다. 이 같은 정책이 타 기관으로 부디 확산될 수 있기를 바란다.
건축가들 역시 성실하게 노동하고 그에 대해 정당한 경제적 보상을 바라는 우리 사회의 전문가 집단 중 하나다. 안타깝게도 설계 용역의 심사와 수주를 둘러싼 건축계 일각의 어두운 구조가 공정하지 못한 룰을 강제하고 건축적 재능과 실력을 갖춘 젊은이들마저 건축가의 꿈을 포기하게 만들어왔다. 이는 건축계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이를 방치한다면 그 폐해는 곧 사회로 이전되어 우리 도시를 형편없는 공간으로 채울 것이다. 다행히도 어두운 골목을 밝힐 가로등이 될 만한 몇 가지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시도가 확산되어 건축의 밝은 골목길에서 어린이들이 깡충거리며 뛰놀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고통스럽게 쓴 이번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