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야기/구본준의 한국의 현대건축

- 한국에서만 가능한, 조각 같은 건축 - 크링

걍~태수 2013. 6. 4. 14:35

 

 

 

 

[구본준의 한국의 현대 건축] 한국에서만 가능한, 조각 같은 건축 - 크링

구본준의 한국의 현대 건축 2013.05.10

 

 

 

 

2000년대 중후반, 주택전시관에 불과하던 모델하우스가 진화를 시작했다. 그중에 크링은 브랜드 이미지를 도시적 건축물로 형상화한 대표적인 복합문화공간이다. 일곱 개의 동심원이 퍼져나가듯 디자인된 외형은 마치 거대한 울림통의 모습을 한 조각품처럼 보인다. 화려한 외형에 이끌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도시와 시민을 소통시킨다는 의도에 맞게 다양한 문화시설이 사람들을 맞아준다. 크링의 용도는 시대의 변화와 소유주에 따라 변하겠지만 그것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는 변치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만 가능한 건축, 한국에만 존재하는 건축, 그런 건축이 과연 있을까?

있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부동산 문화가 낳은 건축 장르, 바로 ‘모델하우스 건축’이다. 집을 분양하면서 실제 완성된 집이 아니라 미리 만든 모델하우스만 보여주면서 판매를 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한국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평생 사는 가장 비싼 물건을 실물이 아닌 견본을 보고 사는 셈인데, 이런 선분양-후시공 방식 때문에 나온 것이 모델하우스다. 아파트를 사기만 하면 재산이 불어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생활공간으로서의 집보다 재산으로서의 집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한 한국 사회를 이 선분양 제도와 모델하우스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도 없을 것이다.

 

 

독특한 한국 문화가 만들어 낸 새로운 건축

2000년대 중후반은 한국 모델하우스가 새로운 건축 장르로 진화한 시기였다. 부동산 열풍으로 아파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면서 건설 회사들은 아파트를 최대한 비싸게 팔기 위해 저마다 아파트 브랜드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래서 모델하우스도 예전처럼 한번 쓰고 나면 헐어버리는 임시 건물이 아니라 마치 작품처럼 근사한 형태의 상설 전시관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게 일대 유행이었다.

건설사들은 앞다퉈 당대의 건축가들을 동원해 미술관처럼 화려한 모델하우스를 지었고 ‘문화적 이미지’를 파는 공간으로 마케팅에 나섰다. 미술 전시는 물론 각종 공연과 행사를 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어 건설사와 아파트 브랜드의 이미지를 고급스럽게 보이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다 보니 화려하고 개성적인 외관으로 건물의 조형미와 개성을 최대한 강조하는 것이 새로운 모델하우스 건축의 특징이었다. 건물 자체의 용도를 중시하는 일반 건축에서는 시도하기 불가능한 과감한 디자인으로 치장해 존재감을 한껏 과시하는 작품형 모델하우스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문화 공간이지만 본질은 광고판인 건축, 한국의 아파트 문화에서 파생된 특이하고 이례적인 건축이었다.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서울 양재동 현대건설의 힐스테이트 갤러리, 하늘에 떠있는 독특한 디자인이 눈길을 사로잡는 민성진 건축가의 서울 서교동 GS건설의 자이 갤러리, 김개천 건축가가 디자인해 세계적인 디자인상까지 받은 서울역 앞 동부건설 센트레빌 주택문화관

등이 대표적이다.

 

 

 이미지를 발산하는 아트 오브제, ‘크링’

당시 탄생한 이 같은 ‘갤러리형 모델하우스’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2008년 서울 대치동에 금호건설이 지은 ‘크링’이다.

반짝거리는 금속 표면에 동심원이 퍼져 나가는 독특한 디자인으로 한 번 보기만 해도 기억에 강하게 남는 이 특별한 모델하우스는 금호건설의 광고 모델로 쓰이며 이 회사를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가 됐다. 개관 직후부터 파격적인 형태로 단숨에 화제가 되며 연간 수만 명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고, 이제는 소유주가 대우건설로 바뀌었지만 지금도 주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로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크링의 가장 큰 특징은 표면의 동그라미 무늬다. 크링(Kring)이란 이름 자체가 ‘원’이란 뜻의 네덜란드어 단어로, 건물 외부는 물론 내부 구조까지 모두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링을 설계한 장윤규 국민대 교수와 신창훈 운생동 건축사무소 대표는 처음부터 이 건물의 콘셉트를 ‘건축물’이 아니라 ‘도시 조형물’로 설정했다. 거리에서 누구나 흥미를 갖고 바라보게 되는 건물, 궁금해져 안으로 들어오면 새롭고 환상적인 공간이 펼쳐지는 건물, 최종적으로는 아파트 회사의 이미지를 높여주는 아트 오브제 같은 건물이 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건축가가 도출한 디자인 상징이 ‘원’들이 중첩되는 동심원 이미지다. 스피커가 소리를 전달하듯 이미지를 전달하는 일종의 울림통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표면에 일곱 개의 파동이 물결치는 디자인이 워낙 이색적이어서 건축가들이 시안을 건넸을 때 금호건설 쪽에서 “정말 이 모양대로 지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을 정도였다.

 

 

크링은 화려하고 재미있는 외관으로 눈길을 끌지만 내부도 외부 못잖게 실험적이었다. 내부는 일종의 무대 공간이므로 크게 비우고, 그 사이로 동그란 다리 형태의 통로들을 하늘에 띄운 채 교차시켜 독특한 공간감을 만들어냈다. 화려하고 실험적인 인테리어도 강력했다. 복합문화공간인 만큼 각종 행사가 펼쳐지는 공간들은 건물 앞쪽과 아래에 배치했고, 본업인 아파트 전시장은 위층으로 올렸다. 외부도 모두 조각 작품 같은 건물이었다.

 

 

크링의 변화는 한국 부동산 시장의 흐름을 상징한다

크링은 2000년대 중후반 등장한 문화공간형 모델하우스들 중 거의 맨 마지막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이후 부동산 경기가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크링 같은 문화공간형 모델하우스는 더 이상 지어지지 않게 됐다. 건설회사들은 갤러리라 이름 붙였던 모델하우스의 용도를 변경하기 시작했고, 결국 하나둘씩 사라져 이제는 크링과 서교동 자이갤러리, 양재동 힐스테이트 갤러리 정도만이 남았다. 크링 역시 주인이 바뀌면서 내부 성격과 꾸밈새는 문화공간에서 다시 모델하우스 기능에 충실한 전시장으로 바뀌었다. 문화를 통해 기업을 알리려던 취지는 사라지고 가장 상업적인 모델하우스 기능으로 돌아가 버린 셈이다.

그럼에도 이 특별하고 한국적인 건물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건설 호황기의 거품을 보여주듯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화려하게 지어 시공 완성도가 높고 아직도 새 건물 같다. 첨단 이미지를 강조하는 외관은 지금 봐도 인상적이다.

   

 

크링을 비롯한 이 당시의 갤러리 모델하우스들은 엇비슷한 건물들만 양산해온 한국 건축에서 가장 조형성을 추구한 건축들이었다. 주변 건물을 압도하려 하면서 홀로 지나치게 튀어대는 문제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건축에선 보기 어려웠던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했다. 이처럼 조각적이고 이렇게 상업적인 건축은 지금껏 없었다. 부동산 경기가 되살아나도 아파트를 통한 재산 증식 가능성이 거의 한계에 도달한 이상, 앞으로도 이렇게 화려하고 이색적인 모델하우스 건축이 다시 등장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크링은 순식간에 피어났다가 일순간에 사라진 이 기형적이고 한국적인 장르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과연 이 건물이 언제까지 남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 건물의 유지 여부와 변화는 그 자체로 한국 부동산 시장의 또 다른 변화를 상징하는 장면이 될 것이다.

 

사진 | 운생동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