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이 고요하니 세상이 고요하네
내마음이 고요하니 세상이 고요하네
생사마저도 자유로 넘나든 수행의 궁극에 이르러서도, 내세울 `나'조차 없었던 대자유인들. 오직 내 몸뚱이와 내 감정과 내 소유만 중시하여 서로 갈등하는 세상에서, `나'의 부와 권력과 명예와 지식과 권위를 쟁취하려 밖으로 밖으로만 내달리는 시대에 이런 `무아'적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벽초 선사는 대찰의 조실이면서도 머슴처럼 살았고, 제선 선사는 누구도 해내지 못한 무문관 수행 6년을 마치고도 `화려한 법상'을 티끌처럼 버리고 자신의 흔적은 완전히 끊어버린 채 중생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경허 선사는 두들겨 맞으면서도 법신을 나투었고, 만해 선사는 일제의 감옥 속에서도 극락을 누렸다고 했다. 보문 선사는 마취 없이 갈빗대를 세 대나 도려내는데도 일체의 망상 없이 고요했고, 지월 선사는 상대방이 뺨을 치는 순간에도 그 내면의 `은둔의 처소'를 잃지 않았다.
혜수 선사는 생사 해탈을 얘기하며 차를 마시던 중 앉은 채로 그대로 몸을 벗어버려 생사자재生死自在를 보였다. 고봉 선사는 기생집에서 술을 마시고 밤을 새우면서도 삼매에 들었고, 석봉 선사는 여인이 음경을 잡고 흔들어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았다. 혼해 선사는 시장 바닥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도 은둔의 마음 그대로였다.
누가 세상의 소란을 탓하지 않고 이미 내 마음속에 있는 극락의 바다, 은둔의 처소에서 천국과 극락을 살 것인가.
아! 일심청정 국토청정(一心淸淨 國土淸淨: 내 마음이 고요하니, 온 세상이 고요하네).
`세상에서 가장 먼 만행' <은둔>(조현 지음, 한겨레출판사 펴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