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객사문
강릉- 객사문
강릉시 용강동에 있는 객사문(客舍門)은 고려 말기의 목조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특히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건축 변화의 발전 과정을 비교 고찰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 유산이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각 고을에 두었던 관사(官舍)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정전(正殿)에 국왕의 전패(殿牌)를 모셔 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월(向月) 망배(望拜)하였으며 왕이 보낸 중앙 관리가 오면 숙박하게 하였던 곳이다. 강릉 객사문은 본래 강릉 객사인 임영관(臨瀛館)의 정문으로 지어진 것이다. 일설에는 범일(梵日) 스님이 관사터에 절을 지었으나 절은 불에 타 없어지고 그 문만이 전해 오다가 그 자리에 부관(府館)을 옮겨 지음으로써 객사문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염양사(艶陽寺)의 3문(門)을 객사로 옮겨 지었기 때문에 사문(沙門)이라 불러왔다고도 한다. 강릉 객사는 1929년 일제시대에 강릉 공립 보통 학교로 이용되다가 헐린 뒤에는 빈 터로 남게 되었다. 1967년 12월 여기에 강릉 경찰서 건물이 세워졌으며, 현재는 객사의 정문만이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문은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맞배 지붕이다.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소박한 인상을 주며 고려시대 건축 양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국보 제51호이다.
이 문에 걸려 있는 현판의 글씨 임영관(臨瀛館)은 공민왕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는다. 임영관 본채를 철거할 때 이곳으로 옮겨 달았다. 임영관을 936년(고려 태조 19) 강릉부 객사로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면도
측면도
평면도
[객사문 구조]
객사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48.42척×15.36척) 규모의 평삼문으로, 주심도리 높이 13.65척, 처마깊이 7.3척, 총건물고 22.75척의 5량집 맞배지붕이다. 전후면의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한 원주이며 자연석 주초위에 세워져 있다. 중앙기둥은 방주이며 그 사이에 정면 3칸에 걸쳐서 판장문을 달았다. 지붕은 약간 솟음을 하고 있다.
원주의 배흘림은 매우 뚜렷하여 밑부분에서 1척 간격으로 직경이 1.84, 1.85, 1.87, 1.89, 1.87, 1.85, 1.80, 1.74, 1.64, 1.5, 1.38, 1.18척으로써 최대직경은 주고의 1/3되는 지점에 있다. (일반적으로 배흘림기둥의 최대 직경은 기둥뿌리 밑으로부터 기둥 길이의 1/3되는 지점에서 위로 1척인 지점에 둔다.)
외목도리와 주심까지의 깊이는 1.75척으로 짧게 구성되어 간결하면서 장중하다.
포작은 2출목 주심포 형식이다. 기둥 위는 창방으로 결구하고 헛첨차가 초제공 살미첨차를 받치고 있어 밖으로 2출목으로 결구되었으며, 안으로는 1출목 구성 위에 대들보가 설치되었다. 주두의 굽면은 곡면이며 굽받침이 있으며 헛첨차의 밑면은 쌍S자로써 그 단부는 사면으로 끊겨 있다. 우미량은 굴곡이 심하지 않고 평보보다 약간 굽게 하였고 7량으로서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중앙에 같은 높이의 방주로 받치고 있다. 종보는 구름무늬로 조각된 동자기둥과 이 위에 우미량 다시 소로에 의해 받치고 있으며 종보의 중앙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